나홍진과 구로사와 아키라
January 15, 2011 10:44 PM
나홍진 감독은 황해의 인물을 순수하다고 표현했다. 어쩌면 그렇게 차가울까. 인터뷰를 찾아보면 외국 소년이 밥을 먹는 무표정한 얼굴을 보았고, 그런 차가운 이미지를 그려냈다고 한다. 얼마나 차가운지 마지막에 여인이 살아남아 기차에서 내릴 때조차 나의 얼굴에는 아무 것도 새겨지지 않았다. 테리 이글턴의 『반대자의 초상』(이매진 컨텍스트 07)에서 얼핏 읽은 문구가 떠올랐다. "... 원인을 고찰하는 이런 현상은 모두 타자성에 홀딱 빠져 헤어날 줄 모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탓이다." 야만적인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황해의 인물에 홀딱 빠져 감독이 헤어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싶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그 인물들이 순수할 수 있다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황해는 너무나 사실적인 이야기고, 조금은 전위적인(혹은 실험적인) 이야기로 보였다. 추격자라는 대작을 만들어낸 나홍진 감독의 영화이기에 기대를 잔뜩 품고 황해를 보았다면 아마 진득한 어떤 감정을 원했을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 가난뱅이들을 살려 두는 것이라고 하는' 공상적 사회개혁가에 조소를 퍼부었다. 버나드 쇼는 가난뱅이들을 경명하며 그 자들이 싹 사라지는 것이 자기 소원이라고 공언했다. 쇼나 와일드 같은 사람들이 정색하고 말했듯이, 사실 이런 이야기들은 다 농담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을 몽땅 쏴 죽여야 하는데" 같은 말을 하면서 약간이나마 통쾌함을 느끼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다.
황해의 관객들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추격자에서는 우리에게 있을 법한, 앞으로 연쇄살인이 언젠가는 또다시 발생할 것이라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사이코패스인 살인마가 영화에서 어떤 매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해에서는 우리 민족(조선족)이 실제 있었던 사건을 끼어놓고 언젠가 또다시 발생할 수 있는 사회 문제로 출발하는 것으로 봤지만, 우리와는 별개의 문제로 보일 뿐이었다. 아마도 감독은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황해의 인물을 나와는 무관한 타자로 구경하게 만드는 의도가 있엇던 것 같다. 그것으로 순수한 폭력도 용서받는다. 물론 누군가는 황해의 인물을 매력적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 민족 인구수도 꽤나 높지 않은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 많다. 그와 관련된 구차하게 반복된 이야기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 주제만으로 이 엔트리를 채우고자 한다. 한 가지 주제란 '좋은 영화'가 주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는 평범한 일본의 소시민 이야기와 시대극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중에 아직 못본 영화들이 몇 있지만, 구하기 힘든 것을 빼고는 볼 만큼은 다 본 것 같다. 나에게 좋은 영화의 특별한 기준은 없다. 다만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 에드워드 양의 영화들은 좋은 영화다. 어쩌면 이 세 영화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지루한 눈꺼풀을 씌운 채 왜 그 영화들이 좋냐고 묻겠지만, 역시나 지루한 답변밖에 해줄 게 없는 것 같다. 질문과 대답이 영화에 있으니. 그런데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들은 지루하지 않게 영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다. 그것또한 '좋은 영화'가 아니겠는가. 고전 영화의 카테고리에 파묻혀있겠지만, 현재에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 같다. 생각해보니 모든 시대극의 개봉은 현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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